[알수없는 인생]
2018년 월드컵이 한창이던 여름, 회사에서 워크샵이 있었다. 교외에 있는 교육시설로 이동해서 숙박을 하는 일정이었다. 일과가 끝난 저녁, 한국대표팀의 월드컵 조별예선 경기가 있었고 같은 공간에서 숙박하는 동료들과 함께 축구중계를 보며 한잔 하는 시간을 가졌다.
더운 여름이었다. 사람마다 기와 체질이 달라서인지 유독 열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숙소에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도 몇몇 이들이 그랬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에어컨은 빵빵하게 가동되었고 숙소 안은 강한 한기가 감싸고 있었다.
유독 열이 많은 사람이 있듯이 그와 반대측 체질인 사람도 있다. 난 에어컨 냉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에어컨을 강하게 틀어 놓은 공간에서 장시간 노출되는 상황에 다소 취약하다.
하지만 처음엔 나도 더웠고 술 또한 제법 마시고 있었으며 더운 여름이었으니 에어컨을 키고 있는 순간에 딱히 불만을 제기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은 자연스럽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각자 편안한 위치에서 잠들었다. 물론 자는 동안에도 에어컨은 가동됐고, 그로인한 한기는 더위를 넘어 나의 몸을 차갑게 식혀버렸다.
그날 이후 난 냉방병에 시달렸다.
감기와는 증상에 차이가 있는 냉방병, 그리고 회복되는 과정과 시간에도 다소 차이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감기는 통상 일주일에서 길면 2주까지, 냉방병 증상이 겹칠경우 한달정도 아프거나 컨디션이 저하된 시간들을 보내곤 한다.
그런데 그 해는 더 심했다. 한달이 지나도 육체적인 불편함은 회복되지 않았다. 나아가 정신적으로도 약해졌다. 나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몸과 마음의 나약함이 나를 지배했다.
처음 드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죽고싶다는 생각이 그렇게 강하게 들었던 것은.
그러던 중 해외출장 일정이 잡혔다. 주된 업무 중에 하나였다.
바닥으로 떨어진 육신의 상태로 해외법인에서 일정을 보는 나에게 현지 근무 중인 동료친구가 감기약과 책 한권을 선물로 주었다. 그 감기약이 큰 도움은 안되는 몸상태임을 알지만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리고 출장에서 돌아와 차츰 몸이 회복되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그 친구의 마음과 선물이 날 회복시켰고 날 살렸다고.
물론 내가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선택은 하지 않았겠지만 그 시간 내가 받던 고통 속에서 날 꺼내주고 살려낸 것은 그 친구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친구가 알려준 드라마가 있다.
‘나의 아저씨’
당시에 이미 방송된 지 몇 달 지났었고 나는 챙겨보지 않았던 드라마였다.
몇가지 이야기를 나에게 덧붙이며 한번 찾아서 보라는 그의 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OTT플랫폼을 통해 ‘나의 아저씨’를 보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 안마의자에 앉아 하루 1편에서 2편씩 며칠동안 집중해서 시청했다.
많은 감정이 교차하고 깊게 빠져드는 내용이었다. 많은 시청자들이 그러하듯 나에게도 인생드라마 중 한편이 되었다.
그리고 드라마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삽입된 노래 역시 진하게 남았다.
매회 흐르는 메인테마곡이 우선 다가오기는 했지만 그보다 내게 진한 여운을 준 노래가 있다.
극중 주인공인 이선균 님이 여러사람 앞에서 부르던 노래
‘아득히 먼곳’
글쎄, 이선균 님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울림이 있었을까? 지나치게 잘 불러도 안되고 못 부르는 느낌이 들어서도 안되는 장면이다. 술을 어느정도 마셔서 힘이 빠진 상태로 많은 것을 담아내는 표정과 노래여야 했다.
어떻게 저렇게 표현을 잘하지?
가끔 그 장면을 다시 보아도 같은 생각이 든다.
사실 이런 분석적인 생각을 하기에 앞서 그 장면에 몰입한 것이 먼저였다.
찬바람 비껴 불어 이르는 곳에
마음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오
먹구름 흐트러져 휘도는 곳에
미련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오
아 어쩌다 생각이 나면
그리운 사람 있어 밤을 지새고
가만히 생각하면 아득히 먼 곳이라
허전한 이내 맘에 눈물 적시네
원곡은 90년대 곡으로 곡이 짧은 가사지만 한 편의 시처럼 담아내는 묘한 울림은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선균 님이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 알수없는게 인생이라고 했던가? 연예인들의 사망소식들을 종종 접하기는 하지만 그의 죽음은 말그대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인생의 허탈함을 느끼게 했다.
'아득히 먼 곳'
그가 떠난 곳이다.
이 노래를 들으면 이선균 님과 '나의 아저씨'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드라마를 보게 되었던 당시의 내가 겪었던 그 바닥을 기억한다. 나의 직장동료이자 친구가 그랬듯이 누군가의 작은 손길이 아픔을 치유하고 나약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오래간만에 그 시간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이선균 님이 편안함이 이르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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